자유로운 글

북한산 종주기

O Chae 2008. 10. 12. 20:06

제116회 2008.8.10(일) 북한산 종주 - 8시간24분

문래역5:30 불광역2번출구 6:06 불광사(아랫) 족두리봉(370m)6;56 송전탑 불광사(윗)/탕춘대/구기터널탐방안내소/향로봉갈림길 향로봉입구7:40 향로봉(535m)뒷쪽 비봉(560m)8:45 사모바위 승가봉 돌문바위 문수봉(727m)10:00 대남문 대성문 보국문10:37 대동문 북한산장11:20 용암문(581m)11:55 노적봉/위문갈림길12:13 위문(740m)12:30 백운대(836.5m)12:50 위문13:7 백운산장 13:30 인수암14:00 인수산장 백운대탐방안내소14:30 버스종점15:00

* 이른 새벽길이라 차량통행도 많지 않았다. 불광역2번 출구를 나와 환경연구원 여성정책연구원을 따라 걷는 데 매미소리가 서로 화음을 내며 울어댄다.  재개발지역 아파트건설현장 덤프트럭이 몰려들고 있었다. 불광사에 이르는 길은 펜스로 담을 쌓아 인도용 작은 통로길만 빼곡이 들어내고 있어 그 길로 오르다. 기상대는 섭씨 30도를 웃도는  무더위란다. 평소 주말보담 사람들이 많지 않아 조용한 산행을 할 수 있었다.

* 佛光寺는 1947년 金道俊 和尙께서 현재 건물을  재건하였으며 옛날 북쪽 蒙古族들이 우리나라를 침입할 때 현재 불광동 독박골에는 나라에 올리는 항아리를  굽던 곳으로 부처님의 白毫光明1이 항아리에 반사되어 몽고족들이 高麗의 진지로 오인하여 물러갔다는  由來로  참으로 호국정신이 충만하던 洞里입니다. 그 후 사람들이 佛光里하며 독박골이라 부르고 있다.(불광사 경내 유래에서)

*족두리봉(370m)에는 비들기 한 마리가 야성을 잊고 사람들이 주는 먹이를 찾는지 슬슬 주변을 맴돌면서 가까이에 있는 날 피하지도 않는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떠있고 멀리 한강물은 넘칠 듯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한전 다녔던 노성환이 늘 관심을 표하는 송전탑이 오늘 따라 산등성이를 따라 드문드문 서있는 모습이 무슨 예술작품조형물처럼 밉지 않게 보인다.

*향로봉입구엔 이른 아침이라 국립공원안전요원이 없었으나 안전을 위하여 전면을 피하여 돌아서 뒤쪽 바위를 타오르다. 주변 낮은 산사이로 이른 아침운무가 피어오른다. 시차를 달리할 때마다 주변 경관도 달리 보이는 자연의 변화의 조화가 아닐 가 한다.

*안전요원도 없어 비봉 북벽으로 오르기 위하여 마지막 채 오르는 지점에서 양손으로 바위 틈 모서리를 잡고 막오르려하는 데 미끄러져 손을 놓다. 전일 오후에 비온 뒤 이른 아침이라 바위에 습기가 약간 있는 데다 손에 땀이 난 때문이었다. 중도 하산 후 돌아서 남쪽 정면으로 오르다.  모처럼 혼자서 진흥왕순수비(모조비)를 배경으로 폰카로 담다.

*문수봉(727m)을 오르기 위하여 알파인 스틱을 접어 배낭에 매달고 오르다. 바위에 조금씩 묻어 흐르는 물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지금은 철제 난간이 설치되어 10여년 전 보다는 훨씬 수월한 편이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오르다.

문수봉 오르기 직전 아래에 있는 돌문바위를 음미해보면 움푹 패인 것하며 소나무까지 언저리에 서있어 마치 여성의 그것처럼 보이니 음문바위라하면 어떨가 한다..

맞은 편 보현봉 뒤쪽으로  용혈봉 용출봉등 의상봉능선, 멀리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노적봉이 차례로 보이고 바로 아래로 승가봉 비봉 향로봉 족두리봉과 함께 구비 쳐 흐르는 한강이 보인다.

 문수봉이 보현봉과 마주 보고 있는 것은 왜 그럴까?

보현봉은 보현보살(普賢菩薩)에서 기인한 산 이름이요 문수봉은 문수보살(文殊菩薩)에서 연유한 산 이름이다.  보현보살은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여래를 협시하는 보살이다. 문수보살은 여래의 왼편에서 여러 부처님의 대지(大智) 즉 큰 깨달음의 상징으로 지덕(智德)을 맡음에 비하여 보현보살은 여래의 오른쪽에서 이(理), 정(定), 행(行)의 덕을 맡는다. 절에 가면 대웅전 중앙에 석가여래를 안치하고 그 좌우에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를 협시불로 함께 안치한 모형은 불교적인 천하관이 투영된 것이라고 한다.

대남문에서 이어지는 대성문 보국문 대동문 용암문 등 산성종주능선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바로 아래 숲길을 걷다.

*북한산대피소에서 점심후 샘물에서 식수를 수통에 채우러 하니 안내판에 식수 부적합판정(검사일 : 2008.7.27)이 씌여져 있어 실망스러웠으나 백운대아래 백운산장까지 버텨야 하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수통에 채우다. 방금 전 산객3명이 야간 산행 후 자리를 떠나면서 옆에 2리터용 생수병이 여러 개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샘터 주변 콘크리트가 금이 가고 일부는 깨어지고 물 뜨는 스틸바가지를 샘물 속에 넣는 과정에서  뭇사람들의 잡균이 묻어 내리는 등 샘물관리가 잘 안 되고 있었다. 국립 공원측에서 좋은 시설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나 등산객에 필요한 식수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썼으면  싶다.

북한산장을 벗어나 조금가면 용암문(581m)인데 대한산악연맹에서 “암릉등반 안전대책 - 안전한 리지등반을 위하여 ”란 책자를 나누어 주었다.

용암문을 지나 숲을 조금 걸어가면 바위 돌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힘들게 통과하면 노적봉/위문 갈림길이 나온다. 이어 만경대 허리를 쇠난간에 의지하여 도는 길이다. 쇠난간을 잡고 조심스럽게 오르다 보면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나무계단이 나오고 나무계단을 숨차게 오르면 북한산성의 성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위문(740m)에 다다르게 된다

* 白雲臺

 북한산의 최고봉인 백운대(836.5m)를 비롯한 인수봉, 만경대의 세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삼각뿔로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 삼각산(三角山)이다. 백운대는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이산에 올라 “ 한 암자 백운중에 누어있네(一庵高臥白雲中)” 라고 읊은 싯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첫 번째 쇠난간 코스를 올라서면 일대를 한 눈으로 조망할 수 있으며 다시한번 쇠난간을 의지하여 암벽을 타면 백운대허리부분에 올라선다. 마지막 쇠 난간에 매달려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면 정상이다. 오른쪽 인수봉에는 정상에 록크라이머들이 벌써 올라와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보이고 또 여러 사람들이 개미처럼 암벽에 달라붙어 기어오르고 있었다. 왼쪽 만경대에도 몇 사람이 올라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 낮인데 웬 고추잠자리들이 떼를 지어 가을을 재촉하는 지 백운대 정상에 날고 있었다.

정상엔 태극기가 펄럭이고 정재용(鄭在容 1886~1976)이 새겨놓은 “ 3.1운동史實 己未 二月 崔南善 “ 글자가 있으며 글자를 밟지 못하도록 통나무로 보호대가 설치되어 있다. 최정상에 일본인이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하여 박았던 쇠말뚝철심(鐵心) 여러개를 뽑아낸 흔적이 있다. 또한 1975.8.5 한국산악회의 “통일서원”비(이은상 짓고, 김충현 씀)엔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조국강산/ 겨레도 나라도 하나이기에 /피와 사랑으로 한 덩이 되어 /우리 손으로 통일을 이루오리다.

*白雲山莊

  현판 손기정 글씨. 1950년 6.25 서울 함락때 자결 순직한 무명장교 및 병사추모비가 있고 뒤편에 백운암이란 암자가 있으며 산장에 등산객들이 붐비고 있었다. 백운대 아래 백운산장의 두레박 우물은 작년까지 만하여도 이용하였으나 덮게가 씌워져있고 수중펌프로 끌어올려 산장과 암자용 식수로 사용하는 모양이다. 산장에서 생수를 사려하였으나 현금이 없어 난처한 입장에 처하였으나 산장 주인이 나중에 들릴 때 주시면 된다며 고맙게도 순순히 선뜻 한 병을 주시었다. 훈훈한 산장인심이 고마웠다. 백운산장에서 박태환의 수영 자유영금메달 소식을 듣다.

*백운산장 바로 아래 개울에서 흐르는 땀을 씻다. 인수암 바로 위 공중화장실에서 냄새가 난다. 바로 아래 인수암 암자에서 식수를 통에 채우고 더운물에 커피를 타마시다. 인수산장관리소에서 유료야영장을 운영하고(1박3,500원) 있어서인지 야영용 텐트가 여기저기 쳐 있었으나 야영객들이 끓이는 라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백운대 탐방안내소 근처에 이르렀을 때  공중화장실 폐쇄를 위하여 고압착암기로 철근 콘크리트 부수는 소리가 요란하다. 백운대 탐방안내소에 도착하니14:30 드디어 종주를 마치다.